아 학생 때는 (라고 해도 십여 년 전) 학교 뒤 북한산성 따라 종로구에서 동대문구로 쉽게 다녔던 기억이 난다. 이 길 저 길 3시간씩 걸어도 끄떡 없는 나였는데. 이젠 바깥 바람을 오래 쐬면 머리가 지루해진다. 아마 운동 부족으로 인한 산소 공급이 안맞는 것이겠지. 에혀
친구와 주말에 가볍게 갈 곳을 찾다가 택한 북악산. 꼭 만나서 맛집 가고 커피 안 마셔도 그냥 얘기하고 걷기만 하고 싶을 때가 있다. 그리고 요즘 물가 돌으셨나요? 서울에서 칼국수 한 그릇에 8천원 아래인 곳을 찾기 힘들다. 먹지 말고 걷자. (고시생이냐고) 여차저차 그래, 서울의 장점이 무엇이냐. 발길 닿는데로 가도 매번 새로운 곳 아니더냐. 마침 또 청와대 개방으로 새로운 경로가 생겼다길래 결정.
가는 길
북악산 청와대 코스는 3호선 경복궁역을 기점으로 갈 수 있다. 요즘 주말에는 광화문에 집회가 잦아 버스를 타면 대부분 우회한다. 그래도 대부분 경복궁역 이후 정류장에선 멈추는 편이니 괜찮을지도. 지하철 타는 게 마음 편하다.
경복궁역 3번 출구로 나와서 청와대로 향한다. 보통 청와대 관광으로 많이 들어가는 그 광장 쪽이 아니고, 청와대를 바라보는 기준 우측으로 더 보도를 따라 직진하면 춘추관이 등장한다.
들어가면 입구에서 방문 예약 등을 물어보는데, 등산 코스를 찾아왔다고 하면 어디로 가라고 알려준다. 그렇게 안쪽으로 들어가자마자 큰 철문이 보인다. 철문을 통과해서 언덕을 올라가면 시작이다. 여기까지가 역 나와서부터 약 30분 정도 걸렸다.
입산 시간
물론 입산 시간 제한이 있다. 하/동절기에 따라 좀 다르지만 대충 3시 이후면 입산 불가하다고 생각하는게 편하다. 넉넉하게 둘러보려면 늦어도 1시 이전에는 춘추관으로 입장하길 추천한다.
해당 입구로 들어가서 북악산을 향해 올라도 결국 성곽길을 따라 여러 갈래로 나뉘기 때문에 제대로 경로를 모른다면 그냥 길 따라 쭉 가는 것도 좋다. 난이도가 전혀 높지 않으니까. (북악산, 인왕산, 뭐 더하면 북한산까지는 다 종로구 일대를 따라 산기슭이 얽혀 있다. 광화문 광장 뒤로 보이는 그 산을 따라 쭉 이어지는데, 아. 명산을 보는 기준은... 지리사를 참고하자.)
백악정 - 대통문 - 만세동방 - 청운대 - 백악마루
아니 이게 뭐야 싶은 경사의 아스팔트 도로를 따라 쭉 오르다보면 이제 진짜 산으로 가나 싶은 입구가 등장한다. 백악정이다. 백악정에도 입장 가능한 제한 시간이 표기 되어 있다. 지원으로 보이는 분도 계시고. 산에 들어갔는데 문이 닫히면 어떡해요? 그냥 이 입구가 닫히는 것이지 다른 길은 많으니, 늦게 입산했다면 사람이 보이는(...) 다른 길로 내려가심 됩니다. 아주 간단하죠.
아주 짧게 등산하는 기분(...)이 나다가 대통문이 등장한다. 대단한 문은 아니고 운동장 철창같이 생긴 문이다. 문 역시 3시면 닫힌다고 하니, 그냥 정신 건강을 위해 산은 아침에 오세요.
대통문을 지나 쭉 위를 향해 걷다 보면 약수터 같은 곳이 등장한다. (힘들었나보다. 사진이 일절 없다. 그냥 오르기만 했군요) 그 근방이 만세동방이다. 아직 뭐 오른 게 없다 싶겠지만은 사실 1/3 이상은 왔다고 보면 된다. 간식 먹어도 된다. 근데 그 다음부턴 계단이 잔뜩이라 부대낄 것이다.
그렇게 쭉 데크 계단을 따라 오르다 보면 청운대가 등장한다. 날씨가 좋아서인지 정말 청운 그 자체로 가득했다. 구름 한 점 없이 푸른, 이 곳의 뷰가 상당히 좋으니 (굳이 미리 말하지 않아도 가보면 안다.) 좀 즐기면서 쉬다가 또 걷는다.
어느덧 윗자락에 다다른지라 성곽인지 돌담이 보이고, 그 길을 따라 걷다 보면 사실상 마지막이라 할 수 있는 백악마루다. 무작정 앞만 보고 걷다보면 백악마루로 가는 길을 놓칠 수 있는데, (사진을 찍을 수 없는 구역이라 생략) 계단으로 내려가는 분기점에서 옆으로 빠지는 길이 있다. 그 곳으로 빠져야 한다. 한참을 올라가다가 또 다시 계단을 내려가기 전, 거대한 소나무와 벤치가 있는 곳이라 딱 알 수 있다.
정상에 도착했다. 잉? 생각보다 쉽다. 인왕산 페이스랑 비슷하다. 사실 서울 산은 경관이 아파트 뷰(...)라서 좀 재미는 없지만. 그래도 산을 오르는 자체의 성취감은 언제나 새롭다. 개인적으로 좋아하는 건 그 성취감과 동시에 내가 정말 아무것도 아닌 존재임을 느낀다. 그 느낌이 좋아서 산에 간다.
북악산 정상은 뭐 먹고 할 환경은 전혀 아닌지라, 내려가는 길에 쉴만한 곳이 보이면 잠깐 쉬기로 했다. 내려가는 길은 어쩌다 보니 계단으로 이어졌다. 사람들이 꽤 많이 올라오고 있었는데 (외국인도 있고), 아마 이 경로가 보통 많이 오는 코스인가보다. 청계산 계단 지옥이 떠오른다.
추위에 다 굳은 토스트와 함께 경치를 바라보며 따뜻한 핫초코를 마셨다. 친구와 얘기도 하고. 음... 막상 등산할 때는 힘들어서 대화 불가다. 그리고 난 체력상 생각도 불가임. 오로지 앞만 보고 위로 올라가는겨.
요즘은 워낙 산을 다니는 사람이 많아 서울 안에 있는 산에도 다 데크 계단이 깔리고 이정표가 있다. 계단, 계단, 계단,... 데크가 잘 깔려 있는 곳은 등산화가 필요 없나요? 그렇지 않습니다. 중력의 힘에 따라 도가니에 무리가 가는 것은 스텝을 나누든 붙이든 똑같으니까요.
데크는 아마 환경 보전과 안전을 위해서인가? 아무튼 데크가 있다는 것은 손잡이와 울타리도 있다는 뜻. 정해진 경로로 정상을 향해서만 올라간다. 물론 경로는 똑같아도, 보이는 뷰는 사람마다 다르다. 그리고 그럼에도 데크가 끊어지는 길 사이로 사람들이 만들어낸 길이 보인다. 어쩔 수 없는 본성이다. 산에는 법이 없다. 뭐 같은 자연을 사는 생명체로서 자연에 대한 그라운드 룰은 있겠지만.
이제는 그런 샛길로 '굳이' 가진 않는 나지만, 예전에는 그런 구분도 필요 없이 그냥 발에 밟히는 곳이 다 놀이터였다. 유년 시절 내가 사는 곳은 인왕산 산줄기 하나가 이어진 어느 아파트 대단지였다. 그 때는 지금처럼 학원이라는 개념이 크지 않았다. 일주일에 한 두 번가는 태권도나 미술 학원이 끝나면 9시까지 놀이터에서 놀았다. 일단 놀이터에 가면 친구들이 많았어서 그냥 가면 된다.
친구들이 없으면 몇 층사는 누구, 아파트 동 앞에서 그냥 소리를 지르면 애들이 나왔다. 누구는 몇 동, 누구는 몇 층... 놀이터가 질리면 달려있는 건지 마는 건지 한 철문 뒤로 산을 올라갔다. 그럼 녹슨 철봉과 운동 기구가 있는 터가 나오기까지 가는 그 짧은 길의 천에 개구리도 있고 다람쥐도 보이고 했다. 그냥 눈에 쉽게 보여서 굳이 요즘처럼 '여기 개구리 있어요'라고 푯말이 필요 없었다. 물에 젖지 않도록 돌을 밟아 뛰고 계단을 오르 내리는 그 작은 미션이 다 놀이였다.
이제는 그럴 수가 없으니까 산에 가는 것 같기도 하다. 그래도 여전히 산은... 그냥 가면 되니까. 그리고 같이 가면 무조건 더 재미있으니까. 하핫. 애들아 나랑 자주 가줘야 된다. 빡센 산 가자고 안할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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